[현대사회와 가치]


내 삶의 결정적 두 마디


문화인류학과 02 정홍성



 흔히 하는 핑계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난 글을 잘 못쓴다.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를 좋아라하고 언어영역 덕이 컸기에 강원대에 들어온 나이지만 글은 정말 못쓴다. 젬병이라는 말이 딱이다. 이것저것 책을 읽다가, 혹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맘에 드는 문장들을 발견하면 기쁘고 행복하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서 기쁨을 주기 위해 펜을 들거나 자판을 두드려보지만 결과는 영 꽝이다. 그렇다고 좋은 글쓰기 습관을 위해서 노력을 한 것도 아니다. 무수히 도전했던 일기쓰기는 최장기간이 일주일이었다. 노력 없는 욕심만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하여튼 글을 잘 못쓰다보니 자연스레 내 생각을 적어내는 리포트나 시험을 싫어하게 됐다. 머릿속에 우겨넣은 암기된 무언가를 적어내는 시험은 맘이 편하지만 내 생각을 적어내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짜증나고 화가 나고 답답하고 싫다. 그냥 주저리주저리 떠들다가 한두 마디 내뱉는 것은 자신 있는데 나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몇 장씩 적어 내려가는 것은 나에게 군대 행군만큼이나 지루하고 힘겨운 일이다. 오늘도 역시나 그 행군을 시작하기에 앞서, 리포트를 쓸 때에는 자유롭게 쓰고 싶은 말을 쓰라고 하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생각나 푸념을 좀 늘어놔 보았다.

 

 나는 수업 첫 시간의 자기 소개란에도 적었듯이 꿈속에서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현실에서 도망쳐 상상 속에서 활개치고 날아다닌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乖離)감으로 항상 아파하기는 하지만 꿈속에서의 유영(遊泳)을 난 포기할 수 없다. 내가 나의 상상을 중요시 하듯이 다른 사람의 상상도 중요시한다. 나만의 상상력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보충한다. 다른 이들의 상상을 얻는 방법은 다양하다. 영화를 보거나 만화를 보거나 소설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려하고 나는 그들에게 받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주는 것을 전부 받지는 못하는 것 같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나를 자동차라고 치자. 그러면 상상이 나의 삶에 연료이고(다른 이의 것이 휘발유, 나의 것이 엔진오일[engine oil]쯤 되겠다)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두 가지는 차대(섀시[chassis])라 할 수 있다. 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나의 뇌리를 통째로 흔들어 놓고, 짧지만 지금까지 계속 되어온 나의 삶에 몸통이자 지표(指標)가 되어주는 두 가지 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나보다 4살이 많은, 나의 전담상담사인 누나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정도 전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다. 한창 IMF로 이집 저집에서 곡소리 나던 시절에 우리 집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다 같이 힘든 시절에 우리 집이라고 용가리 통뼈는 아니었던지라 집안 사정이 바닥에 바닥을 치고 한계에 달한 무렵에 차압스티커를 붙이러 사람들이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시며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셨고 나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고요함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TV만 바라보고 있었다. TV에서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개그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분위기가 너무도 무서워서 눈만 굴리며 앉아 있었는데 순간 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팽팽하던 고요의 장막을 한순간의 웃음으로 찢어버렸다. TV에서 나오던 개그에 웃음이 터진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랐고 옆에 계시던 고모께서 ‘넌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며 누나를 나무라셨다. 중학생이고 집안에서 막내인 내가 보기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누나를 말리려고 하는데 누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울어요?”

순간 난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쩍했다.

‘아 그렇구나, 운다고 뭐가 해결 되는 건 아니구나’.

힘들고 슬픈 상황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그 상황이 해결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을 더 힘들게 만들뿐. 누나의 별거 아닌 한마디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깨달음이었다. 힘든 순간, 괴로운 순간, 아픈 순간마다 누나의 말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고, 커다란 축의 하나인 ‘긍정(肯定)’이라는 것을 얻었다. 

 두 번째는 소설 속 대사이다. 이것 역시 중학교 때의 이야기이다. 한창 판타지(Fantasy)소설이라는 장르문학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던 그리고 금방 물결치던 그 시절, 나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수많은 독자들 중에 하나였다. 누가 권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드래곤라자’(이영도 황금가지 1998)라는 소설을 접했고, 그동안 읽어오고 보아왔던 만화책과 무협지와는 색다른 상상력에 발가락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었다. 짜릿했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그런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행복해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글쓴이의 상상력에 무한한 감사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도 많은 판타지 소설들을 읽었지만(판타지계의 바이블[Bible]이라는 반지의 제왕 등) 처음 접했던 ‘드래곤라자’의 감동을 이겨낼 만한 것은 없었다. 그 소설 속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단수(單數)가 아니다”

나 하나로서 ‘나’라는 존재가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 속의 내가 모여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완성된다는 말이었다. 부모님속의 나, 누나속의 나, 선생님속의 나, 내 친구속의 ‘나’들이 모두 모여야 ‘나’는 존재하는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잊어버린다면 결국 나의 존재는, 나의 삶은 부정당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나를 인정해주는 나를 품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관계(關係)’라는 것을 얻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이며 2차성징의 시기인 사춘기(思春期). 아이에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그 시기에 나는 두 가지를 얻었다. 그것은 ‘긍정’ 그리고 ‘관계’이다. ‘긍정’은 나를 그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게 해주었고, ‘관계’는 수줍음이 많아 사교성이 없던 나를 사람들 속에서 행복해 하는 나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가 되었고 무리들과 함께 뭉쳐 다니는 아이가 되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날 힘들게 하는 것도 있다. 내가 얻은 ‘긍정’은 타고난 긍정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긍정이라서 그런지 고통·슬픔을 떨쳐내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눈치도 못 챈 상태로 쌓여온 것들은 마치 폭탄과 같았다. 마침내 작년 2학기, 누나의 결혼과 집안사정,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인해 10년간 쌓여왔던 것들이 한순간 폭발. 머릿속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2달간 패닉(panic)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생각이 없는 상태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습관적으로 일어나 멍하니 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쉴 새 없이 태워대며 시간만 죽이고 있는, 재충전의 시간이 아닌 방치된 시간. 내 인생에서 2달치 필름(film)이 통째로 편집된 느낌. 귀신보다 무섭고 좀비보다 끔찍했던 시간들이였다.  

 ‘관계’는 나에게 인생을 더 배우라 했다. 선배 중 누군가는 형이 아니었고 누나가 아니었으며 후배 중 누군가는 동생이 아니었다. 동기 중 누군가는 친구가 아니었고 여자 친구는 부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달래지 아니했고, 슬픔만 주고 뒤돌아서 가버렸다. 군데군데 코가 나가버린 그물 같은 인맥으로는 행복을 건져 올리기가 힘들었다. 틈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가슴속은 더욱더 메말라갔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낯선 이를 만나면 끝도 없는 어색함과 불안함에 몸 둘 바를 몰랐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나는 ‘긍정’과 ‘관계’ 이 둘을 버리지 못한다. 머릿속이 말랑말랑 그 시절부터 각인(刻印)되어버린 두 단어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긍정’으로 인해 나의 삶에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더욱더 많아진 것을 실감하기에, ‘관계’로 인하여 수많은 주변인들에게 나를 심고 나의 존재성을 키워나가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기에.

 이미 중독되어버려서 습관적으로 담배에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이, 난 오늘도 역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 속에서 감정을 나눌 것이고 생각을 나눌 것이고 상상을 나눌 것이다. 그 속에서 생긴 안 좋은 일들은 ‘긍정’으로 짓눌러 뭉개버리고 좋은 일들은 내 인맥의 그물코를 고치는데 사용 할 것이다. 내 삶의 지표에 대한 광신도적인 믿음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마치 고농도의 초콜릿의 씁쓸함 뒤에 숨겨진 말로 형용하기 힘든 달콤함을 포기 할 수 없듯, 나는 ‘긍정’에서 나오는 힘과 ‘관계’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레벨:69]id: 허경

2009.03.15 16:46:01

이 리포트 역시 어렵게(?) 구한 것이다. 이 리포트를 쓴 문화인류학과 정홍성 학생은 지난 혹은 지지난 학기 내 수업 현대사회와 가치를 들었는데, 종종 그러는 학생들이 있듯이 리포트를 제출한다고 말하고 하지 않은 학생이다. 나는 이 리포트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터라, 리포트를 내라고 할 작정이었으나, 학생들이 너무 많아 그 학생이 현대사회와 가치를 들은 군대 갔다온 고학번 남학생이며, 제목이 '내 인생의 결정적 두 마디'라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다시 현대사회와 가치 수업을 하는데 출석부를 보니 문화인류학과 학생들이 꽤 되었다. 나는 혹시 몰라 수업 시간에 리포트 이야기를 대충 해주며 혹시 그 학생을 알거든 누구든 연락해서 리포트를 내게 보내달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며칠 전 고대하던 그 리포트를 받았다. 리포트의 주인공은 지금 수업을 듣는 같은 과 여학생의 '남친'이란다! 세상이 좁다. 여하튼 나로서는 이 리포트를 구하게 되어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쁘다. 정홍성 학생은 싸이 홈피의 '잘 쓴 리포트로 선정된 학생들에게'를 읽고 간단한 그림 혹은 사진과 짧막한 감상 소감을 보내주면 실어주겠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이미 읽었다면, 내가 왜 이렇게 이 리포트를 여러분에게 보여주려고 찾아 헤매었는지 이미 이해했을 것이다. 역시 안 될 일은 안 되고, 될 일은 되는 것이다!

지나가는이

2009.10.02 05:49:26

지금 리포트를 써야하는데 어쩜 내 마음과 내생각을 저렇게 잘 표현해 냈는지,
사실 그대로 주욱 써내린 글이 꼭 내머릿속에서 나온거같아,
단숨에 후루룩 읽어지네요.
근데 저게 못쓰는 리포트인가요? ... 왜 스스롤 못 쓴다고 하지,
소설같이 잘 썼는데, 잘 쓴 리포트는 어떤 리포튼지 모르겠어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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